본문 바로가기

Europe Life

오래된 어느 날의 일기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어느날 연락이 왔다.

헤어진 지 얼마 안되었으니 나는 우스개소리로 '내가 너보다 더 일찍 겪었으니 누나다' 라고 하였고

지나친 감성에 젖어 눈물을 쏟을까봐 걱정도 되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역시 헤어진 지 얼마 안된 사람답게 만나면 헤어진 친구 얘기밖에 안했다. 진지하게 만난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그래 너를 내가 아니까, 넌 그렇게 쉽게 사람 못잊으니까 조금만 힘들어해라.. 그치만 당분간은 힘들거다 위로를 건넸다.

사실 나도 누구를 위로할만큼의 컨디션은 아니었음에도.

 

 

"너가 내 첫사랑이다. 벌써 8년 됐다야"

 

밑도 끝도 없는 뜬금없는 소리

전 여자친구 얘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말이냐 ... 혼자 술잔을 들이키더니 답답한 표정.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 친구가 8년 전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내가 힘이 들 때 너가 힘이 되어준 건 있지, 나를 챙겨주었던 것도 기억하고 ..

갑자기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8년동안 몰랐던 걸 아니 알았던 걸 잊어버린걸까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진다.

지나온 8년의 시간들 속에 이 친구의 모습은 별로 없다. 같이 공부했던 그 몇 개월만 빼고 학업과 취직으로 정신없이 각자의 삶을 사느라 연락과 만남은 연중행사였다.

그 친구는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건너 듣기에는 모임의 다른 어떤 사람과 마찰이 있었는데 아직 그게 불편하다였다.

8년 전 함께 있던 시간들은 이제 기억도 안난다 너무 짧았고 나는 한가지에 몰두해야했던 시기였으니까

누군가 고백하면 감사합니다 안녕. 이었고 호감을 가지는 것이 두려워서 한동안 벽을 치고 살았다.

그 와중에 그 아이는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멘탈이 약한 친구라 울기도 많이 하고 담배도 많이 펴서 내가 어깨를 토닥거려준것 같은데. 음.... 부모님이 잘난 형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도 널 똑같이 많이 사랑하셔라고 말해준 것도.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무리 곱씹어도 내 안에서는 친구란 감정이외에는 아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친구로 남아야한다는 의지로 지내와서인지는 모르지만 짧은 순간에 8년의 세월들이 영상처럼 촤르르 돌아갔고 남은 건 8년전의 모습뿐이었다.

그저 친구니까 전화든 텍스트로든 하하호호 했던, 아주 간혹가다 연락을 해도 별로 어색할 것 없는 막역함이었다.

그 친구는 8년전의 모습으로 멈춰져있었다.

내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아직도 그 애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는 것도, 내가 있던 그 시공간이 비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너무 불편해져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앞이 깜깜했다. 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었겠지만 내가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으면 이 어정쩡한 상태로 그 애의 소중한 8년을 부정해버릴것 같았다.

내가 뭐 대단하다고 첫사랑의 그 순수함을 짓밟을 수 있겠는가..

 

가끔이지만 만나면 니가 웃으니까 좋다.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한다 란 말을 했는데 그 두 마디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난 몰랐을까 모르려고 했을까 .. 그리고 긍정적인 아이가 왜 이리 표독스러워졌는지, 혈색은 왜 이 모양인지, 다크서클이 심하다든지 등등 거침없는 지적으로 절대 친구이상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친구와 여자 중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어떠한 빈틈도 주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일방적으로 좋아한거니까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생각해보니 넌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니가 나를 잘 알려고 하지 않았어.. "

 

"그럼 8년 짝사랑을 몇 년 더 추가하지뭐"

 

"야 추가하지마 ㅋㅋㅋ 전여친이나 빨리 비워라"

 

어색함을 무마시키느라.. 난 너무 힘들었다.

 

 

속 편히 얘기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

난 연애를 글로 배워서 그런 거 몰라. 마음가는대로 할 뿐이었지.. 어떻게 표현할 줄도 모르는데뭐.

그냥 너가 어떻게 하면 웃나?하고 생각했을 뿐이었어. 참 단순하지? 하지만 나는 아쉽다.

 

 

아쉽다는 그 텍스트만 왜 볼딕체로 보이는지. 이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두렵다. 특히나 저런 식은 더군다나 ..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란 애는 사실은 부족한 게 많은데..' 임에도 용기를 내어주는 것도 고맙고 요즘같이 자기중심적인 세상에 상처받기 위해 마음을 낸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고단한 하루 끝에서 이런 컴플렉스한 긴장감은 나의 루틴에 신선한 충격이라고 해석하면 긍정적일 수 있을까

친구로 남아주어 고맙다. 가 내가 해줄 수 있는 너에게 최선이었다.

어떤 새로움으로 너를 마주하기에 나는 이미 너가 너무 친구이고 ..

지난 8년의 세월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너의 안녕을 기원할테니 이제 니 마음에서 날 꺼내길 바래.

 

아... 뭔가 죄짓는 이 기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도 있고 그건 자유니까.

너의 말처럼 나도 좋은 남자 만나고 너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해지자.

그리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더 나은거라고 주제넘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2016년 어느 날의 일기 중.